우리말 경전
– 불교성전
원각경12장론관(圓覺經十二章綸貫)
작성자
보리행
작성일
2005-07-15 09:55
조회
11705
圓覺經十二章綸貫
< 斷無明顯覺性 >
1, 序分은 이 經典의 證信序와 發起序이다.
스스로 받고 작용하는 몸으로써 크고 밝은 빛에 들어가게 하니 법의 성품인 땅에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함께 머무르니 범부와 성인의 몸이 같다.
또한 달리 받고 작용하는 몸은 땅위의 큰 보살과 같다. 부처님의 경계는 결과를 돌이키면 다름이 없어서 범부와 성인의 몸이 같다.
결과를 돌이키면 다름이 없다가 이 경의 宗旨인데 證信序 가운데 發起序 가 이와 같은 宗旨 이다.
正宗分의 열두가지 질문과 답을 묶으면 두가지가 된다.
2, 文殊菩薩이 참된 마음을 통달함.
이 처음의 한 장으로 믿음과 앎이 진실로 발라야 완전한 가르침과 문득 깨닫는 가르침으로써 돌이켜 일어나 나아간다고 밝힌 것이다.
修行하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문득 깨닫는 마음으로 허망을 깨끗이 함에 나아가 텅비게 함에 나아간다. 그런 다음에 차차 차례대로 修行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먼저 문득 깨달음을 밝힘으로써 세가지 根機를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장의 법문이다.
3, 普賢菩薩이 반연하여 일어남을 밝히다.
이 아래의 열개의 문장에서는 아는 것에 의하여 행위하고 根機를 따라서 證得해 들어간다.
지금 처음 이 글에서는 마음을 씀을 묻고 풀이 했으며, 앞의 글로써 마음과 깨끗함과 허망함과 텅빔이 허깨비 같다고 했다. 또한 이에 의지해서 修行하면 사악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고, 이미 허깨비 같다고 알았는데 다시 어떻게 修行하는가라 했는데 만약에 修行한다고 말함은 어떠한 말인가.
허깨비와 같다면 나아가고 물러남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해서 안 것에 의해서 修行하는 마음 씀이 모두 세가지 根機가 생각없음을 修行하는 것이 라고 알게 하려는 것이다.
4, 普眼菩薩이 觀法 修行을 묻다.
이 아래의 아홉 문장에서는 널리 세가지 根機가 修行하여 證得하는 행위의 형태를 밝혔다.
그 가운데 처음의 네 문장에서는 觀法을 행하는 上根機의 修行과 證得을 모두 밝혔다.
또한 이 문장에서는 같은 의미인 이론을 같지 않다고 보는 中根機의 다른 세가지 觀法으로 나누어서 모두 밝혔다. 그러므로 모두 라고 했다.
또한 다스릴 바의 미혹에 나아가니 모든 중생에게 무명과 탐냄과 애착함이 다 있기 때문에 다라고 했고 그러므로 모든 障碍를 본다고 했다.
지금 이 한 문장에서 관하는 방법이 부처와 같음을 열어 보이니 먼저 두가지 공은 먼 方便이 된다고 밝혔고, 다음에 두가지 공의 흔적을 털어버림이 가까운 方便이 된다고 밝혔다. 그 다음에 세 겹의 법계를 일시에 완전하게 드러내니 觀法을 행해서 이루면 문득 부처님의 경계와 같아지니 곧 이치를 지혜로써 觀察하여 앞의 생각 없음을 닦으며, 또한 지혜로써 벗어난다.
이 가운데 觀察해서 이루면 그것은 十住의 처음에서 부처가 됨이라고 하고 아래彌勒章에서 일을 가리고 修行한다함이 이것과 같은 때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 가운데서 이미 觀法을 이루면 부처님과 같다고 한 것이다.
5, 金剛藏菩薩이 세가지 어리석음을 설명하다.
이 문장에서는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시작과 끝을 묻고 해석 했다.
본래 이것이 부처인 까닭으로 처음과 끝이 깨달음이고, 본래 깨닭음이 아니므로 처음과 끝이 어리석다. 처음과 끝이 깨달음이므로 앞의 문장 가운데에서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를 이루었고, 처음과 끝이 어리석으므로 뒷 문장에서 윤회를 끊는 까닭에 헛된 꽃의 비유로 결론지었다. 위의 普眼菩薩장에서 본래 이루었음을 금의 광석으로써 비유를 일으켰고 아래의 彌勒章에서는 차차 닦아 나아간다고 했다.
6, 彌勒菩薩이 輪廻를 끊음.
위의 문장으로써 탐냄과 애착함과 무명이 있기 때문에 세가지 어리석음이 일어나고 나고 죽음에 돌고 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앞의 질문들로써 그것들을 끊어 없어앴고, 이치와 지혜가 앞에 나타나서 일을 가리고 修行하게 하며 또한 마음을 해탈케했다.
文殊章에서는 문득 깨달을 때 이치가 부처를 이룸이 되어서 열가지 믿음의 첫 자리에 들어가고, 普賢章 아래에서 부터는 차차 닦지만 普賢章에서는 마음을 씀을 묻고 풀이해서 修行을 일으킴으로써 普眼章에서는 바로 修行함을 밝혔지만 무념으로 修行하니 청량스님께서 문득 닦는다고 하신 것과 규봉스님께서 차차 닦는 가운데 모양을 버리고 닦다고 하신 것이다.
대개 생각 없음과 일을 가림과 상을 따름과 상을 버린다의 이름이 다르고 또한 이치로 행위함과 직접 행위함이 이름이 다르나 곧 두가지를 한꺼번에 修行하면 앞과 뒤가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普眼 보살이 觀法을 행할 때 이미 이 일을 가리고 修行함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이치와 일을 함께 修行해서 온갖 행위가 완전히 이루지면 十住 초에서 부처를 성취함이 이루어지니 곧 이 일이 이치를 이룸과 같아서 진신과 응신 두가지 몸을 갖추어 여덟가지 모양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다.
만약 普眼章에서 오직 생각 없음으로 일을 가림이 없으면 어떻게 능히 十住 처음에 부처가 되겠는가.
글에 문득이라고 써진 것이 아니라고 추측되므로 이 일을 가림이 포함 되어 있지만 나타내지는 않았다. 이러하기에 金剛을 먼저 일으키고 彌勒菩薩이 질문 한다. 또한 彌勒章 가운데 다스릴 바 미혹의 障碍와 행위의 어리석음을 觀察해서 미혹을 끊어 없앤 다음에 바야흐로 普眼이 觀法 修行을 이룬다고 추측되니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닦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7, 淨慧菩薩이 證得한 地位를 나눔.
이 문장에서는 단지 十住 처음에 깨달음을 證得 했을 때 나타나는 지위만를 밝혔다. 위 普眼章에서 十住 처음에 부처를 이룰 때 순 두가지 지위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 문장 중간 끝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살께서 질문을 하셔서 밝히는 것이다. 곧 彌勒章과 이 장에서는 단지 普眼菩薩은 부처를 이룰 때 다스릴 바
어리석음과 證得한 바 지위만을 나타냈고 그 문장 가운데서 두루 말한 것과 같기에 이 두분 보살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이 서로 의지하여 이어 받는다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지위는 기신론의 네가지 지위와 같으니 그 결과와 지위가 최고의 깨달음이라면 이 상태의 본질이 다해서 일이 이치와 같게 나타나 이루어지니 이 는 十住의 처음에 부처가 된 것과 같다.
이미 그 논리를 인용해서 과문과 경전을 비교하면 더욱 이 지위가 普眼菩薩이 觀法을 이룩하는 가운데의 지위와 같이 드러날것이다.
위의 네 문장으로 上根機의 修行과 證得을 마쳤다.
8, 威德菩薩이 세가지 觀法을 가리다.
이 아래 네 문장에서는 觀法을 행하는 中根機의 修行과 證得을 각각 밝힌 것이다. 각각 밝힌다고 하는 것은 앞의 것들이 뒤의 것들과 다르지 않으므로 이미 證得한 上根機는 제외하고 오직 그 가운데 아래의 두 根機만이므로 각각이라고 했다.
또한 이 세가지 觀法을 각각 보는 것은 上根機가 오직 이치가 한 맞이라고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각각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다스릴 바 어리석음의 네가지를 한 사람이 넷을 혹은 세가지 두가지 한가지로 네 가지병을 갖춤이 上根機 사람과는 같지 않아서 무명과 탐냄과 애착 모두가 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각이라고 하니 곧 觀察하는 방법이 다르고 障碍도 다르다.
지금 이 부분 첫 문장에서는 세가지 觀法을 修行하는 中根機의 사람으로써 上根機가 證得한 곳을 문득 깨달으니, 文殊章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허망이 텅빈다고 했으므로 지금 세가지 觀法을 차차 닦아, 觀法이 이루어지면 또한 十住 처음에 부처가 된다.
9, 辨音菩薩이 修行을 거듭하게 하다.
앞의 문장 속에서 비록 세가지 觀法을 밝혔지만 단수로 修行함과 복수로 修行함과 완전한 修行등의 修行 방법들을 나타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스물다섯가지 굴림을 밝혔다. 또한 觀法을 이루면 부처와 같으니 앞의 세가지 觀法과 함께 다 능히 다스리는 方便이 되니 세가지 觀法이 이루어질 때 이미 아래의 네가지 상태와 네가지 병과 다스릴 바 어리석음을 떠나서 十住의 처음에 부처가 되어서 上根機등 모두가 각각 다름이 있지만 이룩한 바의 지위는 같다.
10,淨業菩薩이 네가지 상태를 없애다.
이 아래 두 문장은 모두 다스릴 바 어리석음이 되니 지금 처음의 이 문장에서는 修行하여 證得한 사람이 이리 저리 헤아리고 執着하는 네가지 상태의 잘못이 있지만 다 나라는 견해가 되므로 아집인 번뇌의 障碍가 되고 또한 이 문장은 障碍가 맑고 깨끗한 깨달음인 때문으로 말미암으며 또한 법에 집착 하여 안다고 함도 障碍이기 때문에 문장에서는 두가지 障碍를 모두 깨뜨린다.
11,普覺菩薩이 네가지 병을 버리게 하다.
앞에서는 네가지 상태를 버리고 아울러 없애라고 했지만, 닦고 익힐 때 또한 네가지 병이 있어서 서로 서로 일으키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셔서 스승을 의지해서 병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위의 네가지 상태와 네가지 병을 오직 中根機에만 이르러 말하는 것은 上根機는 根機가 수승 하기 때문에 오직 무명과 탐냄과 애착의 모든 병에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하나를 잘라 끊는 것이 이 이리 저리 일어나는 네가지 상태와 네가지 병과 같은 것이 없다.
中根機는 根機가 下劣하므로 위의 모든 병 이외에도 다시 이러한 등의 어리석음이 있으니 中根機에게 이미 있다면 下根機도 알 만하다.
그러나 위의 두가지를 다스림은 따로 觀法을 이룰때 이미 벗어나지만 글에 문득이라고 쓰여있지 않으므로 이 두 보살의 질문으로 밝힌 것이다.
또한 이 中根機는 세가지 觀法의 모든 방법을 다 차차 각각 修行하기 때문에 普眼菩薩이 이치를 觀察하고 묻득 修行함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세가지 觀法은 어리석음을 다스림과 아울러 직접 修行함이 되지만 생각 없음으로 修行함은 없으며, 普賢菩薩은 모든 생각 없음으로 의지하는 바이다.
또한 세가지 觀法 가운데 고요히 觀察함과 상대가 끊어진 신령한 마음으로 觀察함은 생각없이 修行 한다는 뜻이 된다.
이 문장에서 이미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이루었고 시방의 국토를 밝혀 비춘다고 했으니 곧 中根機의 證得하여 깨닫는 행위와 상태가 또한 쉰두가지 지위를 證得한 상태와 다름이 있지만 上根機와 같기 때문에 위 淨慧章에서 열거 했다. 그러므로 다시 서술하지 않았다.
그 문장 가운데서 그 證得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下根機가 證得한 곳에서는 그 지위를 말하지는 않고 또한 淨慧章에서 열거했다.
12,圓覺菩薩이 세 시기에 道場에서 懺悔를 더욱 행하여서 下根機를 修行 證得케함.
위의 세가지 觀法을 의지해서 각각 편중해서 서로 익히며 능히 다스리면 세가지 修行하는 상태가 中根機와 같아진다.
그러나 오직 어리석은 업의 障碍가 무겁기 때문에 예경하고 참회하는 등의 方便에 에 각각 의지한다.
예경하고 참회함에 각각 편중해서 서로 익히면 능히 다스리는 方便이 된다.
어리석은 업의 障碍는 다스릴 바 어리석음이 되니 어리석음을 없어지고 觀法이 이루어지면 또한 十住 처음의 부처이다.
그러므로 經文에 十萬 世界의 부처님 境界가 앞에 나타난다고 했다.
이는 下根機의 證得하는 상태이다.
또한 쉰 두가지 지위를 서술하지만 위 淨慧章에서 열거 했으므로 다시 서술 하지 않았다.
위는 세가지 根機의 깨달음과 證得함이 단지 더디고 빠름의 다름이 있을 뿐, 그러나 모두 文殊의 순수함을 깨침과 같다. 눈을 돌려 證得하면 十住 처음의 부처님과 같으나 그 닦아 행함에는 세가지 根機가 각각 달라서 그 根機를 따라서 뛰어나고 못남을 따름으로써 다스릴 바 어리석음에 두텁고 엷음과 많고 작음이 있다,
그러므로 능히 다스리는 方便에 한꺼번에 밝힘과 따로 밝힘과 예경과 참회의 다름이 있다.
13,賢善首菩薩이 널리 퍼트림을 설명하다.
위 열하나의 문장에서 법의 뜻이 이미 두루하므로 다른 지방과 멀리 말세의 중생에게 까지 젖어들게 하려고 널리 퍼트리시기를 바랐다.
위에서 세가지 根機를 들어서 가림으로써 한 시기를 들 것 같으면 文殊章은 믿음으로는 華嚴의 결과를 들어서 즐거이 믿음을 내기를 권하는 부분이고 普賢章에서부터 淨慧章 까지의 알음알이는 修行하여서 결과와 계합하여 돌아가 알음알이를 내게 하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비록 觀法을 修行해서 애착을 끊고 닦아서 證得한다는 상태가 있으나 아울러서 그것을 완전히 알려하기 때문에 알음알이의 부분에 해당한다.
威德章에서 부터 普覺章 까지 행위는 법에 따라 修行해 나가서 행위를 이룬다는 부분이며 圓覺章의 證得은 사람에 의해서 證得해 들어가 덕을 이루는 부분이다.
* 東岩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7-18 11:31)
圓覺經十二章綸貫
< 斷無明顯覺性 >
1, 序分은 이 經典의 證信序와 發起序이다.
스스로 받고 작용하는 몸으로써 크고 밝은 빛에 들어가게 하니 법의 성품인 땅에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함께 머무르니 범부와 성인의 몸이 같다.
또한 달리 받고 작용하는 몸은 땅위의 큰 보살과 같다. 부처님의 경계는 결과를 돌이키면 다름이 없어서 범부와 성인의 몸이 같다.
결과를 돌이키면 다름이 없다가 이 경의 宗旨인데 證信序 가운데 發起序 가 이와 같은 宗旨 이다.
正宗分의 열두가지 질문과 답을 묶으면 두가지가 된다.
2, 文殊菩薩이 참된 마음을 통달함.
이 처음의 한 장으로 믿음과 앎이 진실로 발라야 완전한 가르침과 문득 깨닫는 가르침으로써 돌이켜 일어나 나아간다고 밝힌 것이다.
修行하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문득 깨닫는 마음으로 허망을 깨끗이 함에 나아가 텅비게 함에 나아간다. 그런 다음에 차차 차례대로 修行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먼저 문득 깨달음을 밝힘으로써 세가지 根機를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장의 법문이다.
3, 普賢菩薩이 반연하여 일어남을 밝히다.
이 아래의 열개의 문장에서는 아는 것에 의하여 행위하고 根機를 따라서 證得해 들어간다.
지금 처음 이 글에서는 마음을 씀을 묻고 풀이 했으며, 앞의 글로써 마음과 깨끗함과 허망함과 텅빔이 허깨비 같다고 했다. 또한 이에 의지해서 修行하면 사악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고, 이미 허깨비 같다고 알았는데 다시 어떻게 修行하는가라 했는데 만약에 修行한다고 말함은 어떠한 말인가.
허깨비와 같다면 나아가고 물러남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해서 안 것에 의해서 修行하는 마음 씀이 모두 세가지 根機가 생각없음을 修行하는 것이 라고 알게 하려는 것이다.
4, 普眼菩薩이 觀法 修行을 묻다.
이 아래의 아홉 문장에서는 널리 세가지 根機가 修行하여 證得하는 행위의 형태를 밝혔다.
그 가운데 처음의 네 문장에서는 觀法을 행하는 上根機의 修行과 證得을 모두 밝혔다.
또한 이 문장에서는 같은 의미인 이론을 같지 않다고 보는 中根機의 다른 세가지 觀法으로 나누어서 모두 밝혔다. 그러므로 모두 라고 했다.
또한 다스릴 바의 미혹에 나아가니 모든 중생에게 무명과 탐냄과 애착함이 다 있기 때문에 다라고 했고 그러므로 모든 障碍를 본다고 했다.
지금 이 한 문장에서 관하는 방법이 부처와 같음을 열어 보이니 먼저 두가지 공은 먼 方便이 된다고 밝혔고, 다음에 두가지 공의 흔적을 털어버림이 가까운 方便이 된다고 밝혔다. 그 다음에 세 겹의 법계를 일시에 완전하게 드러내니 觀法을 행해서 이루면 문득 부처님의 경계와 같아지니 곧 이치를 지혜로써 觀察하여 앞의 생각 없음을 닦으며, 또한 지혜로써 벗어난다.
이 가운데 觀察해서 이루면 그것은 十住의 처음에서 부처가 됨이라고 하고 아래彌勒章에서 일을 가리고 修行한다함이 이것과 같은 때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 가운데서 이미 觀法을 이루면 부처님과 같다고 한 것이다.
5, 金剛藏菩薩이 세가지 어리석음을 설명하다.
이 문장에서는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시작과 끝을 묻고 해석 했다.
본래 이것이 부처인 까닭으로 처음과 끝이 깨달음이고, 본래 깨닭음이 아니므로 처음과 끝이 어리석다. 처음과 끝이 깨달음이므로 앞의 문장 가운데에서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를 이루었고, 처음과 끝이 어리석으므로 뒷 문장에서 윤회를 끊는 까닭에 헛된 꽃의 비유로 결론지었다. 위의 普眼菩薩장에서 본래 이루었음을 금의 광석으로써 비유를 일으켰고 아래의 彌勒章에서는 차차 닦아 나아간다고 했다.
6, 彌勒菩薩이 輪廻를 끊음.
위의 문장으로써 탐냄과 애착함과 무명이 있기 때문에 세가지 어리석음이 일어나고 나고 죽음에 돌고 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앞의 질문들로써 그것들을 끊어 없어앴고, 이치와 지혜가 앞에 나타나서 일을 가리고 修行하게 하며 또한 마음을 해탈케했다.
文殊章에서는 문득 깨달을 때 이치가 부처를 이룸이 되어서 열가지 믿음의 첫 자리에 들어가고, 普賢章 아래에서 부터는 차차 닦지만 普賢章에서는 마음을 씀을 묻고 풀이해서 修行을 일으킴으로써 普眼章에서는 바로 修行함을 밝혔지만 무념으로 修行하니 청량스님께서 문득 닦는다고 하신 것과 규봉스님께서 차차 닦는 가운데 모양을 버리고 닦다고 하신 것이다.
대개 생각 없음과 일을 가림과 상을 따름과 상을 버린다의 이름이 다르고 또한 이치로 행위함과 직접 행위함이 이름이 다르나 곧 두가지를 한꺼번에 修行하면 앞과 뒤가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普眼 보살이 觀法을 행할 때 이미 이 일을 가리고 修行함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이치와 일을 함께 修行해서 온갖 행위가 완전히 이루지면 十住 초에서 부처를 성취함이 이루어지니 곧 이 일이 이치를 이룸과 같아서 진신과 응신 두가지 몸을 갖추어 여덟가지 모양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다.
만약 普眼章에서 오직 생각 없음으로 일을 가림이 없으면 어떻게 능히 十住 처음에 부처가 되겠는가.
글에 문득이라고 써진 것이 아니라고 추측되므로 이 일을 가림이 포함 되어 있지만 나타내지는 않았다. 이러하기에 金剛을 먼저 일으키고 彌勒菩薩이 질문 한다. 또한 彌勒章 가운데 다스릴 바 미혹의 障碍와 행위의 어리석음을 觀察해서 미혹을 끊어 없앤 다음에 바야흐로 普眼이 觀法 修行을 이룬다고 추측되니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닦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7, 淨慧菩薩이 證得한 地位를 나눔.
이 문장에서는 단지 十住 처음에 깨달음을 證得 했을 때 나타나는 지위만를 밝혔다. 위 普眼章에서 十住 처음에 부처를 이룰 때 순 두가지 지위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 문장 중간 끝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살께서 질문을 하셔서 밝히는 것이다. 곧 彌勒章과 이 장에서는 단지 普眼菩薩은 부처를 이룰 때 다스릴 바
어리석음과 證得한 바 지위만을 나타냈고 그 문장 가운데서 두루 말한 것과 같기에 이 두분 보살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이 서로 의지하여 이어 받는다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지위는 기신론의 네가지 지위와 같으니 그 결과와 지위가 최고의 깨달음이라면 이 상태의 본질이 다해서 일이 이치와 같게 나타나 이루어지니 이 는 十住의 처음에 부처가 된 것과 같다.
이미 그 논리를 인용해서 과문과 경전을 비교하면 더욱 이 지위가 普眼菩薩이 觀法을 이룩하는 가운데의 지위와 같이 드러날것이다.
위의 네 문장으로 上根機의 修行과 證得을 마쳤다.
8, 威德菩薩이 세가지 觀法을 가리다.
이 아래 네 문장에서는 觀法을 행하는 中根機의 修行과 證得을 각각 밝힌 것이다. 각각 밝힌다고 하는 것은 앞의 것들이 뒤의 것들과 다르지 않으므로 이미 證得한 上根機는 제외하고 오직 그 가운데 아래의 두 根機만이므로 각각이라고 했다.
또한 이 세가지 觀法을 각각 보는 것은 上根機가 오직 이치가 한 맞이라고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각각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다스릴 바 어리석음의 네가지를 한 사람이 넷을 혹은 세가지 두가지 한가지로 네 가지병을 갖춤이 上根機 사람과는 같지 않아서 무명과 탐냄과 애착 모두가 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각이라고 하니 곧 觀察하는 방법이 다르고 障碍도 다르다.
지금 이 부분 첫 문장에서는 세가지 觀法을 修行하는 中根機의 사람으로써 上根機가 證得한 곳을 문득 깨달으니, 文殊章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허망이 텅빈다고 했으므로 지금 세가지 觀法을 차차 닦아, 觀法이 이루어지면 또한 十住 처음에 부처가 된다.
9, 辨音菩薩이 修行을 거듭하게 하다.
앞의 문장 속에서 비록 세가지 觀法을 밝혔지만 단수로 修行함과 복수로 修行함과 완전한 修行등의 修行 방법들을 나타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스물다섯가지 굴림을 밝혔다. 또한 觀法을 이루면 부처와 같으니 앞의 세가지 觀法과 함께 다 능히 다스리는 方便이 되니 세가지 觀法이 이루어질 때 이미 아래의 네가지 상태와 네가지 병과 다스릴 바 어리석음을 떠나서 十住의 처음에 부처가 되어서 上根機등 모두가 각각 다름이 있지만 이룩한 바의 지위는 같다.
10,淨業菩薩이 네가지 상태를 없애다.
이 아래 두 문장은 모두 다스릴 바 어리석음이 되니 지금 처음의 이 문장에서는 修行하여 證得한 사람이 이리 저리 헤아리고 執着하는 네가지 상태의 잘못이 있지만 다 나라는 견해가 되므로 아집인 번뇌의 障碍가 되고 또한 이 문장은 障碍가 맑고 깨끗한 깨달음인 때문으로 말미암으며 또한 법에 집착 하여 안다고 함도 障碍이기 때문에 문장에서는 두가지 障碍를 모두 깨뜨린다.
11,普覺菩薩이 네가지 병을 버리게 하다.
앞에서는 네가지 상태를 버리고 아울러 없애라고 했지만, 닦고 익힐 때 또한 네가지 병이 있어서 서로 서로 일으키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셔서 스승을 의지해서 병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위의 네가지 상태와 네가지 병을 오직 中根機에만 이르러 말하는 것은 上根機는 根機가 수승 하기 때문에 오직 무명과 탐냄과 애착의 모든 병에 있어서 하나를 끊으면 하나를 잘라 끊는 것이 이 이리 저리 일어나는 네가지 상태와 네가지 병과 같은 것이 없다.
中根機는 根機가 下劣하므로 위의 모든 병 이외에도 다시 이러한 등의 어리석음이 있으니 中根機에게 이미 있다면 下根機도 알 만하다.
그러나 위의 두가지를 다스림은 따로 觀法을 이룰때 이미 벗어나지만 글에 문득이라고 쓰여있지 않으므로 이 두 보살의 질문으로 밝힌 것이다.
또한 이 中根機는 세가지 觀法의 모든 방법을 다 차차 각각 修行하기 때문에 普眼菩薩이 이치를 觀察하고 묻득 修行함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세가지 觀法은 어리석음을 다스림과 아울러 직접 修行함이 되지만 생각 없음으로 修行함은 없으며, 普賢菩薩은 모든 생각 없음으로 의지하는 바이다.
또한 세가지 觀法 가운데 고요히 觀察함과 상대가 끊어진 신령한 마음으로 觀察함은 생각없이 修行 한다는 뜻이 된다.
이 문장에서 이미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이루었고 시방의 국토를 밝혀 비춘다고 했으니 곧 中根機의 證得하여 깨닫는 행위와 상태가 또한 쉰두가지 지위를 證得한 상태와 다름이 있지만 上根機와 같기 때문에 위 淨慧章에서 열거 했다. 그러므로 다시 서술하지 않았다.
그 문장 가운데서 그 證得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下根機가 證得한 곳에서는 그 지위를 말하지는 않고 또한 淨慧章에서 열거했다.
12,圓覺菩薩이 세 시기에 道場에서 懺悔를 더욱 행하여서 下根機를 修行 證得케함.
위의 세가지 觀法을 의지해서 각각 편중해서 서로 익히며 능히 다스리면 세가지 修行하는 상태가 中根機와 같아진다.
그러나 오직 어리석은 업의 障碍가 무겁기 때문에 예경하고 참회하는 등의 方便에 에 각각 의지한다.
예경하고 참회함에 각각 편중해서 서로 익히면 능히 다스리는 方便이 된다.
어리석은 업의 障碍는 다스릴 바 어리석음이 되니 어리석음을 없어지고 觀法이 이루어지면 또한 十住 처음의 부처이다.
그러므로 經文에 十萬 世界의 부처님 境界가 앞에 나타난다고 했다.
이는 下根機의 證得하는 상태이다.
또한 쉰 두가지 지위를 서술하지만 위 淨慧章에서 열거 했으므로 다시 서술 하지 않았다.
위는 세가지 根機의 깨달음과 證得함이 단지 더디고 빠름의 다름이 있을 뿐, 그러나 모두 文殊의 순수함을 깨침과 같다. 눈을 돌려 證得하면 十住 처음의 부처님과 같으나 그 닦아 행함에는 세가지 根機가 각각 달라서 그 根機를 따라서 뛰어나고 못남을 따름으로써 다스릴 바 어리석음에 두텁고 엷음과 많고 작음이 있다,
그러므로 능히 다스리는 方便에 한꺼번에 밝힘과 따로 밝힘과 예경과 참회의 다름이 있다.
13,賢善首菩薩이 널리 퍼트림을 설명하다.
위 열하나의 문장에서 법의 뜻이 이미 두루하므로 다른 지방과 멀리 말세의 중생에게 까지 젖어들게 하려고 널리 퍼트리시기를 바랐다.
위에서 세가지 根機를 들어서 가림으로써 한 시기를 들 것 같으면 文殊章은 믿음으로는 華嚴의 결과를 들어서 즐거이 믿음을 내기를 권하는 부분이고 普賢章에서부터 淨慧章 까지의 알음알이는 修行하여서 결과와 계합하여 돌아가 알음알이를 내게 하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비록 觀法을 修行해서 애착을 끊고 닦아서 證得한다는 상태가 있으나 아울러서 그것을 완전히 알려하기 때문에 알음알이의 부분에 해당한다.
威德章에서 부터 普覺章 까지 행위는 법에 따라 修行해 나가서 행위를 이룬다는 부분이며 圓覺章의 證得은 사람에 의해서 證得해 들어가 덕을 이루는 부분이다.
* 東岩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7-1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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